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묘청의 난 (문단 편집) === 중앙의 대응 === 서경 세력은 반란과 동시에 가짜 어사를 동북면으로 파견하여 지방 관원들을 체포하고 행정권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들키지 않으면서 세력 확장을 도모했던 것인데 때마침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던 개경 군인 2명이 광경을 목격하고 즉시 복귀해서 반란 사실을 알렸다. 중앙에서는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토벌대를 파견하기로 했고, 김부식, 임원애를 중군수(中軍帥)로 삼았다.(우군만 2천명이라고 알려져 있으며 좌군과 중군의 규모는 알 수 없다.) 출병 전 김부식은 "서경의 반역에 정지상ㆍ김안ㆍ백수한 등이 가담하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대신들은 이에 동조하여 정지상 등 3명을 불러 목을 벤 후 그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로 인해 '김부식이 문인으로서의 명성이 자신과 비슷했던 정지상을 반란을 핑계로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다른 일도 아니고 처형을 왕에게 묻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결정해서 실행했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당시 사람들로서는 김부식의 이런 행태에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종은 임원애로 하여금 도성을 지키게 하고, 김부식에게 부월을 하사하여 출전시켰다. 이 당시 반란군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각지에 병력을 파견한 상태였다. 하지만 몇몇 지역에서 주민들에게 가짜라는 걸 들켜서 역으로 격퇴당했다. 인종은 반군을 몰아낸 이들에게 포상을 내렸는데,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성에서도 서경에서 온 병력을 공격하였고, 그 결과 1천2백여 명의 반란군이 죽었다. 김부식의 중군은 보산역(寶山驛)에 당도한 후, 앞으로의 전략에 대해 의논했다. 장수들은 "서경의 방어가 갖춰지기 전에 서둘러 공격하자."며 속전속결을 주장했으나, 김부식은 "적이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거사하였을 테니 이미 상황이 늦었다. 무작정 진격한다면, 복병이나 기습에 당하거나 혹은 반군에 호응한 다른 군세에 의해 길이 막힐 수 있다. 적의 배후를 우회하여 주변의 여러 성들을 장악하여 서경을 고립시킨 후 압박하여야 한다."며 장수들의 의견에 반대했다. 이에 따라 중군은 좌우군을 이끌고 평주-관산역(管山驛)-사암역(射嵒驛)-신성부곡(新城部曲)을 거쳐 성주(成州)에 당도하였으며, 격문을 모든 성에 보내 반란을 진압할 것임을 선언했다. 중앙에서도 수군을 징발하여 순화현(順化縣) 남강(南江)으로 보내 적의 배를 막도록 하였다. 김부식은 군리 노인해를 서경으로 보내 투항을 권유하는 한편, 연주(漣州)를 거쳐 안북부(安北府)에 당도했다. 이때 동계에서 진숙과 이주연 등이 와서 김부식에 합세하였다. 그 전까지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던 각 지방은 김부식이 대군을 이끌고 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굴복하여 관군을 맞아들였다. 정리하면, 우군은 서경에서 동북면으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하고, 좌군은 서경과 개경을 잇는 도로를 점하여 서경의 남쪽을, 중군은 (우군이 점거한 지역을 통해 우회하여) 서경의 북쪽을 점거했다. 그리고 중앙에서 징발한 수군은 [[대동강]] 하구를 차단하여 서경의 서쪽을 점거하였다. 반란군은 완전히 포위된 것이다. >(전략) >○ 무신일에 묘청과 유감(柳旵)이 분사 시랑 조광(趙匡) 등과 더불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중략) 신해일에 군인 최언(崔彦)과 한선(韓善) 등이 황주(黃州)로부터 와서 아뢰기를, “서경 사람이 군병을 거느리고 동선역(洞仙驛)에 이르러 사록 고보정(高甫正)을 잡아 가고, 또 역에 있는 말을 빼앗아 서경으로 보냈으며, 사람들이 서울로 왕래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낮에는 숨고 밤에 걸어 사잇길로 온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재신과 추신들을 불러 의논하고 평장사 김부식, 참지정사 임원애, 추밀원 승선 김정순(金正純)에게 명하여 병부에 앉아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토벌할 계획을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김부식ㆍ임원애를 중군수(中軍帥)로, 김정순ㆍ정정숙(鄭旌淑)ㆍ노영거(盧令琚)ㆍ임영(林英)ㆍ윤언이(尹彦頤)ㆍ이진(李瑱)ㆍ고당유(高唐愈)ㆍ유영(劉英)을 그 좌(佐)로, 이부 상서 김부의를 좌군수로, 김단(金旦)ㆍ이유(李愈)ㆍ이유개(李有開)ㆍ윤언민 (尹彦旼)을 그 좌(佐)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주연(李周衍)을 우군수(右軍帥)로, 진숙(陳淑)ㆍ양우충(梁祐忠)ㆍ진경보(陳景甫)ㆍ왕수(王洙)를 그 좌로 삼았다. (중략) >○ (중략) 갑인일에 양부의 대신을 불러서 묻고 그날 장차 출병하려 하니, 김부식 등 여러 장수가 대궐로 나아가 명을 기다렸다. 김안(金安) 등이 출병의 시기를 늦추어 반역을 도모하려고 아뢰기를, “금 나라의 사신을 인견하고 조서를 받으신 후에 장수를 보내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김안 등이 몰래 병장기를 모으고 가만히 서로 소곤거리니 그 음모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부식이 여러 재상과 상의하기를, “서경의 반역에 정지상ㆍ김안ㆍ백수한 등이 가담하고 있으니, 이 사람들을 제거하지 않고는 서경을 평정시킬 수 없다." 하니, 여러 재상들이 그렇게 여기고, 지상 등 3명을 불러서 그들이 이르자 은밀히 김정순에게 말하여 무사로 하여금 3명을 끌어내어 궁문 밖에서 목을 벤 뒤에 비로소 위에 아뢰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식은 평소 지상과 같이 문인으로서 명성이 비슷하였는데, 문자 관계로 불평이 쌓여, 이에 이르러 ‘지상이 내응한다’ 핑계하고 죽인 것이다." 하였다. 왕이 임원애에게 명하여 도성에 머물러 호위하라 하고, 김부식에게 부월(鈇鉞)을 하사하고 보내며 이르기를, “도성문 밖의 일은 장군이 처결하라. 그러나 서경의 적도 모두 나의 적자(赤子)이다. 그 괴수만을 죽이고 부디 많이 죽이지 말라." 하였다. 을묘일에 묘청의 무리인 최봉심(崔逢深)ㆍ음중인(陰仲寅)ㆍ이순무(李純茂)ㆍ오원사(吳元師)를 먼 섬으로 귀양보냈다. 김부식의 중군이 금교역(金郊驛)에 이르자 때마침 눈이 내려 군사와 말이 얼고 굶주려 군사들의 마음이 해이해졌다. 부식이 위무하고 또 먹을 것을 나누어 주니 군대의 상황이 비로소 안정되었다. 순찰하던 기병이 서경의 첩자 전원직(田元稷)을 잡아 왔다. 부식이 결박한 것을 풀어 주고 위로하여 돌려 보내며 말하기를, “네가 돌아가서 성안의 사람에게 말하되, '대군이 이미 출동하였으니, 스스로 뉘우치고 귀순하는 자는 생명을 보전할 것이다.'고 하라." 하였다. 이날 서경의 장군 일맹(一孟)이 와서 적의 실정을 자세히 고하니, 왕이 벼슬로 상 주고 주택을 하사하였다. >병진일에 홍이서와 이중부가 서경으로부터 돌아오니, 부식이 이서는 직접 조서를 전하지 않고 역리를 보내어 조서를 전했다는 것으로 평주(平州)에 가두고, 중부는 백령진(白翎鎭)으로 귀양보냈다. 서경의 적이 성주(成州)에 이르러 왕명을 거짓으로 꾸며 방어사의 관료를 잡아 결박하고 민가에 난입하여 음식을 마구 토색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거짓임을 알고 5, 6명을 쳐서 죽이고, 20여 명을 가두고는 말을 달려 보고하니, 왕이 조서를 내려 권장하고 관료에게 약 한 은합(銀合)을 각각 하사하고, 장리(長吏 지위가 비교적 높은 관원)와 장교에게는 폐백을 차등 있게 주었다. 또 연주(漣州)의 호장(戶長) 강안세(康安世)와 중랑장 김인감(金仁鑑)은 위병마 부사(僞兵馬副使) 이자기(李子奇), 장군 이영(李英) 등과 군졸 6백여 명을 잡으니, 교서를 내려 권장하고, 위로하며 비단과 채백(彩帛)을 하사하였다. 여러 성에서 듣고 서경의 적 1천 2백여 명을 잡아 죽였다. 정사일에 (중략) 부식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서경의 적도가 반란을 꾀한 지 이미 5, 6년이니 그 음모를 주도면밀하였을 것이며, 반드시 싸움과 수비를 충분히 대비한 뒤에 거사하였을 것이니, 이제 그 대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엄습한다는 것은 너무나 늦지 않은가. 또 아군이 적을 경솔히 보는 마음이 있고 병기도 정비되지 못한 터에, 갑자기 복병의 기습을 당한다면 이것이 첫째 위태한 일이요, 견고한 성 아래로 군사를 끌고 가서 날은 춥고 땅은 얼어 진터도 이루기 전에 불시에 적이 틈을 탄다면 이것이 둘째로 위태한 것이다. 또 들으니, 적도가 조서를 위조하여 양계에서 징병을 한다 하니 여러 성에서는 의심하여 진위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만일 간사한 이들이 적도에 호응하여 안팎으로 서로 연결하여 도로가 막힌다면 이보다 더 큰 화가 없게 된다. 지금의 정세로는 군사를 끌고 사잇길을 따라 적의 배후로 우회하여 여러 성의 군량을 빼앗아서 대군을 먹이고, 순과 역으로써 잘 타일러서 서경의 적들과 절교하게 한 연후에 병력을 증강하고 휴식시키며 나라의 위업을 선양하고, 적진에 격서를 보내고는 서서히 대군을 몰아 위압하는 것이 만전(萬全)한 계책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을축일에 중군이 군사를 인솔하고 평주를 거쳐 관산역(管山驛)으로 향하고, 좌우군이 서로 차례대로 이어 진군하였다. 중군은 사암역(射嵒驛) 신성부곡(新城部曲)을 경유하여 지름길로 성주(成州)에 이르러 하루 동안 군사를 쉬게 하고, 격문을 모든 성에 보내어 명을 받들어 적을 치는 뜻을 고하였다. 이날 조서를 내리기를, (중략) 내시지후(內侍祗候) 정습명(鄭襲明), 제위보 부사 허순(許純), 잡직서령 왕식(王軾)에게 명하여 서경의 서남해도(西南海島)에 가서 수군 4천 6백여 명과 전함 1백 40척을 징발하여 순화현(順化縣) 남강(南江)으로 들어가서 적의 배를 막도록 하였다. (중략) >○ (중략) 부식이 군리(軍吏) 노인해(盧仁諧)를 시켜 서경에 가서 투항을 권유하고, 또 성안의 허실을 엿보게 하고 드디어 대군을 인솔하고 연주(漣州)로 길을 잡아 안북부(安北府)에 다다르니, 진숙과 이주연 등이 동계로부터 와서 합세하였다. 앞서 녹사(錄事) 김자호(金子浩) 등을 보내어 칙서를 품고 사잇길로 양계의 성과 진을 돌면서 서경 적도의 모반한 실정을 효유하였는데, 지방의 인심이 오히려 관망하는 태도이더니, 대군이 이르니 비로소 모든 성과 진에서 떨고 두려워하여 관군을 맞아들였다. (후략) >-------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294A_0110_010_0040_2000_002_XML|고려사절요 제10권 /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 을묘 13년(113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